부천님 생애 붓다의 뗏목
붓다시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6월호), pp.12-20에 게재된 것이다.
1. 베다 종교의 출현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아대륙(亞大陸)에는 여러 인종들이 들어와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더스문명의 주체자였던 드라비다(Dravida)인과 호주-아시아(Austro-Asia)계 이후 인도 아대륙의 새로운 주인공은 인도-아리야(Indo-Arya)인이었습니다.
인도-아리야인들은 인도-유럽인 가운데에서도 인도-이란인(Indo-Iranian)의 지파(支派)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리야인이라는 말이 모든 인도-유럽인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인도 아대륙의 인도-유럽계 사람들만을 한정해서 쓰고 있습니다.1)
이들은 원래 인도 아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과 인도 아대륙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산·이동하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힌두쿠쉬(Hindukush)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부를 통해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의 판잡(Panjab) 지방에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600-1,300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
그 시기는 정확한 것이 아니고 학자들에 따라 약간 다르게 추정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야(Arya)라고 부르면서 다른 원주민들과 엄격히 구별하였습니다.
아리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Rg-veda) 등에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리야인들이 처음에는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수백 년 동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갠지스강 유역에 도달, 거기에서 다시 남인도 쪽으로도 뻗쳤습니다.
현대에 이르는 동안 선주민족(先主民族)과 혼혈하고 문화적으로도 복잡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3)
인도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베다>라는 오래 된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베다>에 의지하여 세습적인 바라문이 희생(犧牲) 등의 종교의식을 집행,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다}는 절대 신성하며, 바라문은 나면서부터 최고라고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야인의 생활은 주로 목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유나 유제품(乳製品)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바라문과 함께 소를 신성한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리야인은 목축민이라 농경(農耕)은 그렇게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4)
그러나 아리야인들이 판잡 평원(平原)에서 점차 동진(東進)하면서 농경생활에 적합한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는 주로 농경에 관계가 깊은 신(神)들을 모시는 제의종교(祭儀宗敎)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베다(Veda)종교 또는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라고 합니다.5)
그들은 기원전 1,100년-900년경에는 이미 갠지스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합니다.
그들은 다시 동쪽과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자연환경에 힘입어 농업을 더욱 발전시켜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본래는 사제(司祭)였던 바라문들이 점차 하나의 사회계급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술(呪術)의 힘을 기조(基調)로 하는 제식(祭式)의 효과를 강조하고 이 제식을 독점함으로써 종교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라문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祭式) 만능주의(萬能主義)를 특징으로 하는 바라문 중심의 문화가 이른바 바라문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꽃피게 됩니다.6)
이와 같이 바라문 문화는 서력 기원전 10-6, 5세기 경에 성립되었으며, 그 본거지는 남북으로는 빈디야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한정되며, 동으로는 프라야가, 서(西)로는 비나샤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현대의 웃타르 프라데쉬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곳을 중국으로 불렀습니다.
즉 '바라문 중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가 활약했던 비하르주의 동방은 이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변방이었습니다.7)
2. 정치적 과도기(過渡期)
아리야인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서는 당시 최강의 부족이었던 바라따(Bharata)와 뿌루(Puru)족간의 전쟁이 유명한데, 그 결말은 마하바라따(Mahabharata)라는 장편의 서사시로 구전되고 있습니다.8)
붓다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기(激變期)였습니다.
종래의 군소 부족국가들이 점차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 체계가 형성됩니다.
초기경전에는 이른바 16대국(大國)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앙가(Anga), 마가다(Magadha), 카시(Kasi), 코살라(Kosala), 밧지(Vajji), 말라(Malla), 체띠(Ceti), 방사(Vamsa). 쿠루(Kuru), 판찰라(Pancala), 맛챠(Maccha), 수라세나(Surasena), 앗사카(Assaka), 아반띠(Avanti), 간다라(Gandhara), 캄보자(Kamboja) 등입니다.
이러한 16대국의 명칭은 고대 통일국가를 이룩했던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붓다 당시에 모두 실재(實在)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당시의 복잡했던 정치상황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16대국을 포함한 붓다 당시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화정(共和政)과 군주정(君主政)의 두 가지 형태의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고, 이들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전제군주(專制君主) 국가들은 주로 야무나강과 갠지스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공화정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군주국가의 팽창에 맞서 공화국들(ga a-sa ghas)은 존립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또한 군주국끼리의 큰 전쟁도 빈발했고, 공화국끼리의 작은 싸움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공화국은 점점 쇠퇴해가고, 군주국은 영토와 국력을 증대시켜 갔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추세였습니다.9)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의하면, 붓다 당시의 석가족은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10)
장아함(長阿含) 유행경(遊行經)에는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이 밧지(Vajji)를 정복하고자 하여 대신(大臣) 우사(禹舍)로 하여금 붓다께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마가다국의 파탈리가마(Pataligama)는 대신 우사가 밧지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옵니다.11)
또 사분율(四分律) 권39에는 코살라의 파사익왕(波斯匿王)과 마가다의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비구들이 그 죽은 사람들의 옷을 가서 가져오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는 베살리(Vesali)의 릿차비족(Licchavi)과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12)
이 밖에도 붓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은 상당히 많습니다.13)
그런데 본래 고대 인도의 공화제는 종족사회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고, 또한 전제군주제는 이러한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殘存)하는 종족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하였습니다.
붓다시대의 존존 종족으로는, 사캬족(Sakya)을 비롯하여 말라종족(Malla), 리챠비종족(Licchavi), 비데하종족(Videha), 박가종족(Bhagga), 불리종족(Buli), 콜리야종족(Koliya), 몰리야종족(Moliya), 브라르마나종족(Brahmana), 칼라마종족(Kalama), 티바라종족(Tivara), 판다바종족(Pandava), 카칸다종족(Kakanda) 등이 알려지고 있습니다.14)
원래 종족사회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한 사회로서, 당시 종족사회는 원시공동체 사회의 최고 조직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화제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과정에서 해체되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전제군주제 국가든 공화제 국가든 모든 국가들은 종족사회가 붕괴한 폐허 위에 건설되었던 것이며, 더욱이 강력한 전제군주국가는 다른 약소국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종속시켜갔습니다.
코살라국에 의한 석가족의 멸망, 그리고 마가다국에 의한 코살라국의 멸망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정복적·노예적 관계를 거부하고 종족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종족들은 서로 연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지족은 리차비족과 비데히족의 연합종족으로서, 고대 인도 최후의 민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15)
3. 상업의 발달과 도시화
붓다시대에 있어서 사회기구의 변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경제적 사회를 확립하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확립한 근본기조(根本基調)는 촌락사회기구로부터 도시국가기구에로의 변동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병행해서 직업의 분화(分化), 생산기술의 향상, 대상인(大商人)의 출현, 동서교통로, 특히 서방제국(西方諸國)과의 교통로의 확립 등, 종래의 사제자(司祭者) 바라문에 의한 농촌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저한 사회변동을 가져왔습니다.16)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800년경에 철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철의 사용에 의해 농기구와 그 이외의 도구가 개량되었으며, 이는 숲의 개간과 농업 생산의 증대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수공업 제품의 증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지가 증가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풍부하게 생산된 제품은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를 사고 파는 상인계층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적과 교통의 불편함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시골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했습니다.
그들은 점차로 이 교역로의 안전을 위하여 무력을 지닌 왕족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교역의 이익을 확장하였으며, 동시에 왕족은 재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로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가 개척되고,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폐쇄적인 농촌의 부족사회는 도시에서 붕괴되어 갔습니다.17)
특히 상업의 발달은 자연히 교환의 매개체로서 화폐를 필요로 했습니다.
육로와 수로의 무역에서 제일 먼저 취급된 것은 금, 은, 보석 등의 사치품과 특산물이었습니다.
먼지 지역을 운반하기에 부피가 적으면서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취급하다가 점점 다양한 품목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물물교환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점차 금속통화(金屬通貨)가 많이 이용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주조(鑄造) 동화(銅貨)나 타각인(打刻印)을 지닌 방형, 원형의 은화, 금화, 동화를 이용한 교환 경제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발행권은 국정의 최고 수반인 국왕의 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18)
이와 같이 군주제 국가가 신장됨에 따라 국가의 장벽을 넘는 통상, 경제행위가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불가분 왕권의 강화와 결부되어갔습니다.
화폐경제가 일반화되고, 도시에는 상공업자의 길드도 생겼습니다.
조합장과 대상인의 자본가와 왕족은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사성제도(varna)에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재래의 농촌과는 다른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가치관의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는 옛날의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19)
4. 반바라문적 사상운동의 태동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제식(yajna)은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습니다.
현세이익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청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제식에 부수된 동물의 희생이 혐오되었으며, 그 효과도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푸자(puja)라는 새로운 예배의식도 토착문화에서 출발하여 번성하게 됩니다.
옛날의 신들은 몰락하고, 쉬바 또는 비슈누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습니다.20)
동시에 인간의 지식의 발달은 종교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해탈' 의 경지를 희구하게 되었습니다.
해탈에 관한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그 가치는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윤회와 업의 사상도 이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은 왕족이 이러한 새로운 설을 바라문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제, 사회, 지성, 종교성 등의 여러 면에서 바라문 지상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초기의 불교경전이 사성을 기록함에 있어 크샤트리야를 바라문 보다 앞서 열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21)
이러한 변모를 겪으면서 초기의 힌두문화는 급격히 동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역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변모를 수반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인도에서 현저하였습니다.
동인도는 바라문중국(中國)의 입장에서 보면 변방지역이며, 그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바라문 문화의 속박을 덜 받는 지방이었습니다.
힌두세계에 동화되어 가면서도 독자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바라문적 또는 반바라문적 분위기도 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사상운동이 꽃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은 슈라마나(Sramana, 沙門)라는 출가유행자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바라문적 색채를 감추려 하지도 않고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였습니다.22)
붓다도 이러한 슈라마나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문화 등 인간생활의 여러 면에서 재래의 전통이 의심되었던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23)
1. 석가족은 어느 종족인가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를 추적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학자나 인도학자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학자들까지 석가족(釋迦族)1) 이 인도-아리야계 즉, 인도-유럽인의 일족(一族)이었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학자들은 석가족이 아리야계로 자신들과 동족이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석가족의 인종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석가족이 비(非)아리야 계통의 종족이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석가족이 비아리야계 인종이었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면서 주목받고 있습니다.2)
그러면 과연 석가모니 붓다가 속한 석가족은 어느 인종에 속하였을까?
조준호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도 유럽인(백인종)이었을까?
몽고 인종(황인종)이었을까?
아니면 드라비다(Dravida)인이나 호주-아시아(Austro-Asia)인이었을까?
아니면 이러한 인종들간의 혼혈이었을까?"3)
이러한 네 가지 인종은 인도 아대륙에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 온 주요한 구성원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석가족은 기원전 1,700년경 인도 서북부 지역으로 들어와 점차 동남쪽의 야무나강과 갠지스강을 따라 이동하였던 인도-아리야계의 한 부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는 석가족이 아리야계라는 단정 아래 고대인도사나 불교사가 서술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 저명한 인도사학자 스미스(Vincent A. Smith)씨가 석존은 몽고인종이라는 설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석가족에 근접하여 살았던 릿차비(Licchavi)족이 티베트의 장례 풍습과 사법절차가 행해졌던 점을 증거로 들어 그 근친 종족인 석가족 또한 아리야계가 아닌 티베트 계통의 몽고계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4)
그러나 당시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계에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5)
한편 일본의 불교학자 미야사카 유쇼(宮坂宥勝)는 석가족은 비아리야족이며 지리문화적 배경으로 보아 몽고계 인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붓다의 씨족은 인도에 베다(Veda) 문화를 일으킨 아리야족과는 다른 몽고계의 한 부족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6)
또한 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도 석가족은 비아리야 인종이라는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7)
그의 주장 내용은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의 <인도불교>에 일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의 주장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불전은 사캬족이 <리그 베다> 이래의 영웅으로 일종족(日種族)의 선조인 이크슈바쿠(Iksuvaku)왕의 후예라고 합니다.
팔리어로 오카카(Okkaka) 왕이라고 하며, 감자왕(甘蔗王)으로 한역되는데, 이 역어는 언어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왕은 푸르족과 야다바족의 선조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비아리야계의 부족입니다.
따라서 이 왕의 후예라고 하는 불전 자체의 기록에 따르는 한, 사캬족은 아리야인 계통이 아닙니다.
그리고 석존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콜리야족 출신이라고 하였는데, 이 콜리야족도 오스트로-아시아계의 문다어를 사용하는 코르인과 관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8)
그리고 태국의 불교학자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붓다의 생애를 정치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매우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했습니다.9)
그는 이 논문에서 석가족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락카나 숫따(Lakkhana Sutta, 三十二相經)>에 묘사된 "그들의(석가족)의 안색은 청동 빛과 같았으며, 그들의 피부는 우아하고 부드럽고, 그들의 눈과 머리칼은 흑색이었다"10)라는 신체적인 특성과 "석가 왕국이 설립되었던 네팔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따라서 분포된 민족의 대부분은 몽고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석가족들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11)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면 당시 히말라야 산록 일대로부터 비하르, 벵갈 지방에 이르기까지 티베트·버마 인종의 제부족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히말라야 산간 지역에 이 계통의 부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사캬족이 티베트·버마계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12)
그러나 사캬족이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캬족은 크샤트리야(Kshatriyas)라는 것입니다.
크샤트리야는 아리야인의 계급으로 사캬족이 그 안에 위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아리야인임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캬족의 사람들 그리고 석존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캬족의 사회는 부계사회로서 모계제 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사캬족이 아리야계 인물이라고 결론짓는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13)
이에 대한 반론은 사캬족이 크샤트리야라고 하지만 새로운 부족이 아리야 문화권에 흡수되어 갈 때, 무력과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크샤트리야로 자칭함으로써 아리야화되어 가는 사례가 여러 차례 있으므로, 크샤트리야라고 해서 아리야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14)
또한 사캬족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로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인종집단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인도-유럽계통의 언어를 쓴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모두 인도-유럽인이 아니고 인도-유럽인 가운데도 드라비다계통의 언어를 쓸 수 있고 드라비다인 가운데도 인도-아리야어를 쓴다는 것입니다.15)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캬족에 비바라문, 반바라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라문 계급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는 공공연히부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베다적인 제사도 수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석존이 슈라마나(沙門)로 수행을 시작하였던 것도 비바라문적 요소가 강한 동인도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6)
나라 야스아키의 지적에 따르면, "그 후의 불교문화의 발전을 살펴보면 비바라문적 토착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요가의 중시, 사리(유골)숭배, 스투파(탑)숭배, 동물숭배, 지모신(地母神) 계통의 야크샤니(Yaksan, 불전의 夜叉, 藥叉의 여성), 그 남성으로 귀령(鬼靈)의 하나인 야크샤 숭배, 나가(Naga, 뱀, 龍神) 숭배 등이 그러한 것이다.
물론 아리야 계통의 사람들도 이러한 토착문화를 흡수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을 가지고 사캬족이 인종의 계통에 있어 비아리야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캬족, 그리고 석존에서 시작되는 불교가 비아리야적 요소가 농후한 인도의 토착문화적 토양 가운데에서 성립·발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17)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캬족이 아리야인이라는 설의 근거도 박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의 인종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도 불충분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 성과에 의하면 사캬족은 아리야계와 비아리야계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라 야스아키가 말한 것처럼 현재로서는 사캬족이 아리야인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되어 확증적인 증거들이 나타나면 사캬족이 비아리야 계통의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에 관한 기술은 대부분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지 밝혀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사카족은 자기의 종족에 대한 계보(系譜)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왕국이 코살라(Kosala)나 마가다(Magadha)에 비해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18)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에 석가모니 붓다께서 직접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9)
석존께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루기 전,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에서 탁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탁발 모습을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고 있던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 왕이 그의 뛰어난 용모와 비범하지 않은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신하를 보내 석존이 머물고 있던 처소를 알아냅니다.
그런 다음 왕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나는 당신의 태생을 알고 싶으니 말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기슭에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코살라 나라의 주민으로 부(富)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20)
"가계(家系)는 아딧짜(Adicca, 태양)이고, 태생(가문)은 사끼야(Sakiya, 석가족)입니다.
나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내가 기쁨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입니다."21)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붓다는 분명히 자신의 가계는 아딧짜(Adicca, 태양를 의미함)이고, 가문은 사끼야(Sakiya), 즉 사캬(Sakya)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숫따니빠따>에서는 석존이 '감자왕(甘蔗王, Okkakaraja)의 후예' 이고 '석가족의 아들(Sakya putta)'22)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태양의 후예(Adiccabandhu)' 2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딧짜(Adicca)라는 호칭은 좀더 빈번히 쓰이는 수리야(Suriya, 태양)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붓다는 종종 '태양의 후예(Adiccabandhu, 日種族)' 로 불렸습니다.24)
또한 디가-니까야(Digha Nikaya, 長部)의 암밧타-숫따(Ambattha-sutta, 阿摩晝經)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의 친설의 형식을 빌어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감자왕)라는 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5)
이 전설은 암밧타(Ambattha)라는 바라문 청년이 붓다께 석가족의 비천함에 대하여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석가족의 기원과 옥까까(Okkaka)왕으로부터 청정한 혈통이 유지된 석가족의 기원과 함께 암밧타의 혈통도 같은 왕과 하녀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암밧타여, 만일 너의 이름과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씨족을 생각한다면, 사캬족은 성스럽게 태어났지만, 너는 사캬족의 하녀의 아들이다.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왕이다.
오랜 옛적에 옥까까 왕의 왕비는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서 다른 부인에게서 태어난 옥까무카(Okkamukha), 까라깐다(Karakanda), 핫티니까(Hatthinika), 시니뿌라(Sinipura)를 왕국에서 추방시켰다.
그들은 추방당한 뒤,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Saka) 숲에서26)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다.
옥까까 왕은 왕자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의 신하에게 물었다.
'왕이시여, 그들은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자 옥까까 왕은 감격적인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왕자들은 진실로 훌륭하다(Sakya).
왕자들은 진실로 가장 훌륭하다.'
그때부터 그들은 사캬족(Sakyas)으로 알려졌으며, 옥까까 왕은 사캬 종족의 시조가 되었다." 27)
이것은 완성된 전설 중의 일부이며,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와 티베트 율장 및 팔리 주석서 등의 여러 곳에 실려 있습니다.
특히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주석서에서는 옥까까 왕 이전의 계보 등이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설, 즉 "첫 번째 사카족으로부터 왕들의 가계는 마하바스뚜와 티베트 문헌 및 팔리 연대기들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 서로 너무나 다르다.
이것은 한 계통의 가계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년대기에 있는 명단들은 자따까(Jataka, 本生譚)에 나타나는 여러 왕들처럼 대부분 분명히 인위적으로 끼워 넣은 것들이다?28)라고 에드워드 토마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파우스뵐(Fausboll)은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은 라마야나(Ramayana) 설화와 그 변형된 것이 자따까(본생담)에서도 발견된다고 지적했습니다.29)
지금까지 살펴본 사캬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 붓다의 씨족은 아딧짜(Adicca)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사카족이 아리야계의 태양씨족(太陽氏族)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0)
하지만 정반대로 이것을 근거로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임을 증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1)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석가족의 나라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8월호), pp.12-19에 게재된 것이다.
1. 석가국의 실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동북부에서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경에 활약했던 분입니다.
그는 북인도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방에 있던 석가국1)에서 태어났지만, 출가하여 중인도 갠지스강 남쪽의 마가다(Magadha)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수행을 하여 35세가 되던 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붓다의 조국인 나라 이름[國家名]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를 국왕, 즉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라고 칭하고, 그의 어머니를 마야(Maya, 摩耶) 왕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태자(太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붓다의 고국인 석가국이 큰 나라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가능한 석가국에 대해 좋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국은 붓다 당시 정치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붓다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으로 엄격히 말해서 석가국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다만 편의상 석가국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고향, 사캬족(석가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불교도의 저작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도의 정치사에서 석가국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석가족의 나라는 바흐라이치(Bahraich)와 고라크뿌르(Gorakhpur) 사이 네팔의 접경에 인접해 있는 여러 주들의 동북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경전들의 서두에 나옵니다.
경전들에서는 수도 까삘라밧투(Kapilavatthu, Skt. Kapilavastu, 迦毘羅城)와 석가족의 여러 마을 혹은 군구(郡區), 그리고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avatth , Skt. Sravasti, 舍衛城)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만으로는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2)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정보는 세 가지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석서와 그 주석서에 기초를 둔 편찬물들에 기록된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도 성지(聖地)를 직접 방문했던 중국의 순례승, 즉 법현(法顯, 399-414 A.D.), 현장(玄奘, 629-645 A.D.) 등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2.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였습니다.
까삘라밧투를 중국의 역경가들은 가비라성(迦毘羅城)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고향이 굉장히 큰 고대 도시의 성(城)으로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대한 성이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더라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성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실제로 이 까삘라밧투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 밝혀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조사와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었던 법현과 현장의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은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이 까삘라밧투를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佛國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향해 1요자나(약 9마일) 남짓 가면 까삘라밧투에 이른다.
성(城)안은 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하여 다만 얼마간의 승려들과 민가가 수십 호 있을 뿐이었다."
또 7세기 경, 저 현장(玄奘)이 그곳에 갔을 때는 더욱 황폐해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석가족의 수도 까삘라밧투는 사왓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세기 말 경에 영국의 탐험가 커닝엄(Cunningham)3) 이 여러 문헌을 섭렵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였으나 까삘라밧투라는 이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4)
그러나 그 뒤 빈센트스미스 등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 있습니다.5)
스미스씨는 "비록 법현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성스러운 장소[聖地]를 현장 또한 보았다.
현장은 여러 가지 다른 부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자들이 같은 장소를 묘사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매우 다르다"6)고 지적하였습니다.
스미스씨에 의하면 법현이 보았다고 하는 까빌라밧투는 빠다리아(Padaria) 남서쪽 9말일 지점에 있는 삐쁘라바(Piprava)였고, 현장이 보았다고 하는 까삘라밧투는 서북쪽 14마일 지점에 위치한 띨라우라 곳(Tilaura Kot)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7)
이러한 자세한 지리적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밧투(vatthu)'란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입니다.8)
까삘라밧투는 까삘라뿌라(Kapilapura, 迦維羅弗羅)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이 까삘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삘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므로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9)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hvaku, Okka ka, 甘蔗王)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크슈바꾸, 즉 감자왕(甘蔗王)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크슈바꾸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사캬'라는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서울이 까삘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까삘라밧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0)
3.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Rohi )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을 꼴리야(Koliyas, 拘利)족이라고 부릅니다.
석가족의 수도는 까삘라밧투였고, 꼴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였습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11)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두 가지, 즉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 공화제(共和制)가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Vajjis)과 말라족(Malla s)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몽골계]는 공화제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비아리야계 종족이었으나, 이미 아리야 계통의 전제군주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12)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습니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석가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입니다.13)
석가족과 꼴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江)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Gotama, 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석가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가족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꼬살라국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습니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14)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꼬살라국도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15)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 Skt. Kshatriya)'나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16)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17)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꼬살라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18)
1. 탄생에 관한 전설
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습니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1)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 되기 이전에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는 동안 끝없이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 거기에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생 설화들은 대부분 여러 생애를 통해 선행의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도솔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솔천하강설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도솔천은 보살(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합니다.
이때 보살은 하생의 시기와 대륙과 나라와 집안에 대해 살핀다고 합니다.
시기라 함은, 인간 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타락한 세상에서는 종교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륙[洲]이라 함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네 개의 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 잠부드비파(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출현에는 거기가 제일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같은 인도 중에서도 변경(邊境)이 아닌 중앙부가 좋다고 선택됩니다.
인도 사회의 계급은 세습 종교가인 바라문과 무사 귀족의 크샤트리야(刹帝利)가 상위(上位)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크샤트리야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보살도 그런 집안에 태어나기로 한다는 것입니다.3)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다시 보살에게 그 조건을 물으니, 보살은 국토에 대해서는 예순 네 가지, 어머니가 되실 분에 대해서는 서른 두 가지 조건을 내어놓습니다.
말하자면 국토의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말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그 인품이 뛰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들은 여러 보살과 신들은 석가족의 숫도다나왕(淨飯王)과 마야비(摩耶妃)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합니다.4)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신과 천녀들은 머지않아 보살과 작별할 것을 슬퍼합니다.
보살은 자기의 후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정했다고 합니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하고 언젠가는 석가모니를 본받아 지상에 내려가 부처가 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5)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 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윤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오늘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6)
다만 우리는 이러한 설화를 통해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7)
2. 역사적 붓다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꼬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8)
붓다는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Maya, 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9)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습니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족의 공주였습니다.10)
초기성전에서는 고따마(Gotama, Gautama, 瞿曇)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소' 라고 하는 의미의 족성(族姓)입니다.
그의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 Siddhartha, 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의 뜻)이지만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입니다.11)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40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석존의 탄생이 이 가문(家門)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12)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 )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13)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 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14)
그런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석존을 낳은 지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가 양모가 되어 석존을 양육하였습니다.
3. 붓다의 탄생지 : 룸비니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 )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15)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소까 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16)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 )은 연못과 샘 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습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입니다.17)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소까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그 꼭대기에 마상(馬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뒷날 벼락으로 돌기둥이 중간에서 꺾이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896년, 그 당시 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퓨러(A. Fuhrer)라는 사람이 네팔에 들어가, 이른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라는 마을이 룸비니의 고적임을 확인했습니다.19)
특히 아소까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현장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돌기둥의 위쪽은 꺾여진 채 없어지고 말았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있어 거기에 적힌 비문의 넉 줄 반의 글자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석주에는 93자로 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소까)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여기서붓다 사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20)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dhe jate Sakyamuni)21)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해 이곳이 룸비니 동산이었음이 분명히 밝혀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4. 탄생 연대
붓다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전과 북전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불교도들은 불멸(佛滅)을 기원전 544년(또는 543년)으로 보는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세일론(스리랑카) 불교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학문적으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 현재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붓다의 재세 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22)
첫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560-480년 설입니다.
이것은 주로 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세일론의 사서(史書) 등의 자료를 검토하여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멸 연대를 서력 기원전 489년(A. Bareau), 487년(V. A. Smith), 484년(H. Jacobi), 483년(W. Geiger 등), 482년(J. Fleer) 혹은 478년(J. Filliozat), 477년(F. Max Muler 등)으로 보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들의 학설은 이른바 중성점기(衆聖點記 ; 많은 聖者들이 불멸 후 <律藏>에다 매년 점을 하나씩 찍어 온 기록)에 희한 486년 설(수정설은 485)과도 거의 일치합니다.23)
두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460-380년 설로서 일본의 우이하쿠주(宇井伯壽)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학설입니다.
우이(宇井)은 아소까 왕의 즉위 연대를 기원전 271년으로 추정하고 이 즉위가 불멸 후 116년에 거행되었다고 하는 북전(北傳)의 불교 전승에서 역산(逆算)하여 불멸을 서력 기원전 386년으로 산정하였습니다.
아소까 왕의 연대는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다소 수정되어 현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268년 즉위설을 취합니다.
따라서 붓다의 연대는 서력 기원전 463-383년으로 수정됩니다.24)
이상의 두 가지 학설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고대 인도에 있어 역사 관념의 결여, 연대의 불명확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100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25)
우리나라에서 붓다의 탄생일을 4월 8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 Vaisakha, 인도력의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함) 월의 만월일(滿月日)을 붓다의 탄생·성도·열반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도와 중국의 역법(曆法)이 서로 틀리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젊은 시절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10월호), pp.12-19에 게재된 것이다.
1. 태자의 어린 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 만에 그의 생모(生母)였던 마야(Maya) 왕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야 왕비의 사망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너무 미화시킨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마야 왕비가 일찍 사망한 원인은 아마 산후 몸조리를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가던 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야외에서 출산한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이동하여 왕궁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태자가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태자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봅니다.1)
그 후 태자는 그의 이모(姨母)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언니인 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난다(Nanda, 難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교단(敎團)은 그녀의 출가로 인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붓다의 어린 시절을 종합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다는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어느 날 농부가 일구어 놓은 땅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자 새가 날아와 그 벌레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태자는 생물은 서로 해친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합니다.
둘째, 붓다는 천성적으로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2)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冥想)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족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어린 왕자도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농경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여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29권의 <유연경(柔軟經)>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초선(初禪)의 경지를 체험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또 옛날을 생각하면, 농부가 밭 위에서 쉬는 것을 보고 염부(閻浮)나무 그늘에 가서 가부를 맺고 앉아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욕계(欲界)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었다."3)
이 때가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을 때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쾌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오래된 조각(彫刻)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4)
한편 후대에 성립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제4권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태자의 선정에 대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자가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사선(四禪)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하여 성도(成道)를 향한 고행을 마치고, 과거 소년시절 체험했던 명상의 시간을 회상하여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좌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붓다의 젊은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붓다께서 만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앞에서 인용했던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자신을 위해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부왕(父王) 숫도다나(悅頭檀) 집에 있을 때에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 및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푸른 연꽃 연못·붉은 연꽃 연못·빨간 연꽃 연못·흰 연꽃 연못 등 여러 가지 연꽃 연못을 만들고, 그 연꽃 가운데에는 온갖 물꽃, 곧 푸른 연꽃·붉은 연꽃·빨간 연꽃·흰 연꽃을 심어서 언제나 물이 있고 언제나 꽃이 있었으며, 사람을 시켜 수호하여 일체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시켜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 檀香)을 내 몸에 바르고 새 비단옷을 입혔으니, 위아래나 안팎이나 겉과 속이 다 새 것이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언제나 일산(日傘)을 내게 씌웠으니, 나로 하여금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
내가 옛날의 아버지 숫도다나 집을 생각하면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正殿)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오직 기생만 있어서, 스스로 즐기면서 당초에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삼십명의 제일 훌륭한 기병(騎兵)을 뽑아 의장(儀仗)이 앞뒤에서 시종하고 인도하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런 여의족(如意足)이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유연(柔軟)한 것이었다."6)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7) 이와 같이 태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좋은 조건과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붓다는 세속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즐기며 지내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자는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며 예기(藝妓)들의 시중을 받는 궁궐생활에 오히려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세속적 야망에 만족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입니다. 초기 팔리어 사료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환멸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8)
보통 사람들은 추한 노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병의 고통이나 병자의 추잡스러움을 바라지 않지만, 병에 걸리는 것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젊은 날의 붓다는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두려움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젊음이 넘치는 그의 신체로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9)
이러한 세속적 쾌락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단지 끝없는 고통이라는 생각은 이 젊은 왕자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통해서 평화와 고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0)
2. 태자의 교육
태자는 당시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技藝)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就學)을 한 것은 일곱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인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1) 그리고 태자는 <베다>는 물론 <베다>의 보조학(補助學)도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자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 암송(暗誦),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語源)에 관한 학문, 사전(史傳)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붓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周知)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2)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文)의 면만이 아니라, 무(武)의 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무사계급(武士階級)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武術)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소다라비(妃)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13)
태자는 인도의 언어와 고전 문학 등의 일반적인 학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도보경주, 원반 던지기와 창 던지기 등의 육체적인 단련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기예, 즉 말타기, 코끼리 타기, 전차 몰기 그리고 군대의 배치법을 배웠다고 합니다.14) 이와 같이 전기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태자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을 쌓는데 필요한 온갖 학문과 기예를 습득했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습니다.15)
3. 태자의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리고 그 태자비(太子妃)가 라훌라(Rahula, 羅候羅)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모든 불전(佛傳)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6) 결혼의 시기는 16세, 17세, 19세 20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 따르면 16세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6세에 결혼한 것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의 이름은 남방성전(南方聖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북방성전(北方聖典)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ahulamata, '라훌라의 어머니'의 뜻)라든가 밧다깟짜(Bhaddhakacca) 혹은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跋陀迦旃延)로 불려지고 있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범어로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 '영예를 지닌 여성'의 뜻)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뒷날 팔리어 성전의 주석서에서도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승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이름도 정하고 있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17)
남방의 팔리어 전기(傳記)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羅候羅母)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흔했던 것 같습니다.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중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소다라(耶輸陀羅)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야소다라에 관한 이야기는 붓다께서 성도한 뒤 옛 왕성(王城)을 방문했을 때, 출영(出迎)한 것과 그 후에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니승(尼僧)이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18)
붓다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삶의 문제를 통찰하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에도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얻게 된 그의 깨달음은 그의 단순한 천재성이나 직관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속된 내성적 성숙과 노력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19)
붓다의 출가와 수행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11월호), pp.11-18에 게재된 것이다.
1. 출가의 동기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 Sk. Gautama Siddhartha)는 온갖 호화로움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한 학문이나 무예도 결코 싯닷타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싯닷타는 부족함이 없는 왕궁의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인간이나 세계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를 괴롭힌 것은 생(生) · 노(老) · 병(病) · 사(死)와 같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와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Sk. Mahaprajapati Gautama, 摩訶波闍波提瞿曇彌)는 이런 왕자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싯닷타가 훌륭하게 자라나 왕위를 잇고 석가족(釋迦族)의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그런 세속의 일보다는 항상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혹시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늘 염려하였습니다. 싯닷타를 서둘러 결혼시킨 것도 이러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1)
이와 같이 젊은 날의 싯닷타는 자신이 처한 위치와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문헌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뇌는 주로 생·노·병·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로서 정리되었던 것입니다.2)
초기경전인 <마하빠다나 숫따(Mahapadana sutta, 大本經)>에는 과거세(過去世)의 비바시불(毘婆尸佛)의 '사문유관(四門遊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붓다는 유원(遊園)으로 가기 위해서 곱게 꾸민 수레를 신두산(産) 말에 매고 가던 중,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진 채 지팡이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모든 것이 늙는다면 태어나는 일 자체가 화(禍)라고 느꼈으며, 마찬가지로 질병과 죽음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았고, 최후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자신도 집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3)고 합니다. 이것이 후세에는 정형화(定型化)하여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4) 이 전설에 의하면 태자는 왕성(王城)의 네 개의 문으로부터 출유(出遊)하여 각각 노인·병자·죽은 사람, 그리고 수행자를 만났다는 것이며, 이것이 출가의 동기(動機)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출가 동기로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 '사문출유'의 전설은 후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인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 普曜經)>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태자는 동쪽의 성문을 나와 노인을 만나고, 남쪽의 성문을 나와 병자를 만났으며, 서쪽 문을 나와 죽은 자를 만나 비애(悲哀)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북쪽 문을 나와 출가 수행자를 만나 그의 숭고한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팔리어로 씌어진 <자따까(Jataka, 本生經)>의 주석서 서설(序說)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 세 차례의 출유(出遊)에서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나 도중에서 되돌아섰던 태자는, 네 번째의 출유 때 사문을 만나고서 자기 생애의 목표를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마음 가볍게 그대로 동산에 가서 해질 녘까지 즐겁게 놀았습니다. 동산의 못에서 미역을 감고 향을 뿌린 몸에 새 옷을 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립니다. 바로 이때 성 안에서는 태자비가 사내아이를 낳았으므로 숫도다나왕은 기뻐하면서 급히 시종을 보내어 태자에게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라훌라가 생겼구나!" 라고 외쳤습니다. 라훌라(Rahula)란 '장애(障碍)'라는 뜻입니다. 은애(恩愛)의 굴레가 늘면 출가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그 아이는 라훌라(羅候羅)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날 태자의 귀로에는 시민들의 환영으로 떠들썩했다. 어느 길가에 왔을 때, 한 높은 누상(樓上)에서 무사 귀족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i, 機舍喬答彌)가 태자의 행렬(行列)과 그 행렬 속의 태자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행복하겠네,
저런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행복하겠네,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받드는 부인은 행복하겠네.
이 노랫소리가 태자의 마음을 끈 것은 그 노래 속의 '행복하겠네'(Nibbuta)란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태자가 늘 구해 마지않던 열반(涅槃)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5) 태자는 '드디어 출가할 시기가 온 것을 깨우쳐주었다'라고 생각하고 아주 기뻐하며, 그 답례로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벗어 그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끼사 고따미는 '태자는 날 사랑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기뻐 어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궁전에 돌아온 태자는 출가의 결심을 하고, 그 날밤 마부 찬나(Channa, Sk. Chandaka, 車匿)에게 분부하여 애마(愛馬) 깐타까(Kanthaka, 犍陟)를 채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하지만, 태자비의 팔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만지면 태자비가 눈을 떠 출가의 기회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말없이 떠나버렸다고 합니다.6)
이처럼 불전문학(佛傳文學)에 씌어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있었겠지만, 이것은 후대의 불전 작가들이 보다 드라마틱하게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7) 이것은 '인간 고뇌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붓다의 출가 목적을 확실히 드러내려고 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8)
여하튼 싯닷타 태자가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 라훌라(Rahula, 羅候羅)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출가를 결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싯닷타는 남몰래 왕궁을 빠져 나와 출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습니다. 후대 불전에 의하면 태자는 어느 날 밤 몰래 마부 찬나(Channa)를 앞세워 애마 깐타까(Kanthaka)를 타고 까삘라밧투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나이는 29세였습니다.
싯닷타가 뒷날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다음,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9)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중아함경 권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잡아함경 권14, 346경>
위에서 살펴본 사문유관의 도식적인 묘사나 이같은 붓다 자신의 술회는 다같이 싯닷타의 절실한 출가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슬퍼하였으며, 불완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을 괴로워했습니다. 그 끝에 마침내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을 찾아 세속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 버린, 참으로 '위대한 버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10)
2. 구도의 편력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닷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후대의 문헌에 속하는 테리가타(Theragatha, 長老尼偈)의 주석서에서는 그의 편력(遍歷)에 대해서 처음 박가와(Bhaggava)의 은신처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우선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 또한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난 싯닷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 梵天)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그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11)
이 외에도 많은 수행자들을 찾아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에 의하면, 그는 출가하여 바라문 여성 싸끼(Saki)와 바라문 여성 빠드마(Padma)의 은신처에 초대를 받았으며, 바라문 라이와따(Raivata) 성인과 뜨리만디까(Trimandika)의 아들 라자까(Rajaka)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때는 싯닷타가 베살리에 도착하여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12)
이렇게 싯닷타의 구도 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리 거리에 위치한 베살리(Vesali, Sk. Vaisali, 毘舍離城)로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 Sk. Arada Kalama, 阿羅羅伽羅摩)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Sk. Rajagrha, 王舍城)에 도착했습니다. 신흥의 도시 라자가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싯닷타는 그곳에서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 Sk. Udaraka Ramaputra, 優陀羅羅摩子)라는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3) 웃다까 라마뿟다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싯닷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소유처정'보다 더욱 미묘한 선정의 경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선정에 들면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마치 마음이 '부동(不動)의 진리'와 합체(合體)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일상의 동요하는 마음으로 되돌아옵니다. 따라서 선정에 들어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해서 진리를 체득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선정은 심리적인 마음의 단련이지만, 진리는 논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진리는 지혜에 의해 얻어집니다. 그래서 싯닷타는 그들이 택하고 있는 수정주의(修正主義)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14)
베살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깔라마와 함께 웃다까 라마뿟따는 당시 가장 명망높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습니다. 선정(禪定)주의자 또는 수정(修定)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닷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정신통일이란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지이며, 정신적 작용의 완전한 정지 또한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5)
그들은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혼동한 채 오로지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같은 모순을 알게 된 싯닷타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답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스승으로 삼아왔던 웃다까 라마뿟따와도 작별하였습니다.16)
싯닷타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가하에서 남쪽으로 80㎞ 가량 떨어진 우루웰라(Uruvela, Sk. Uruvilra, 優樓頻螺)의 세나(Sena, 斯那)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Sk. Nairanjana, 尼連禪河) 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던 이 곳은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17)
싯닷타가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라자가하의 성 밖의 판다바 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왕은 성 안에서 탁발하고 있는 싯닷타를 발견하고, 그 단정한 태도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을 시켜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스스로 수레를 갖춰 판다바산으로 가서 동굴에 거주하던 싯닷타를 방문하고, 코끼리 무리를 선두로 하는 군대와 재력을 제공하여 원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싯닷타의 출가 수도를 중지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자신이 유서 깊은 샤카족 출신으로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벗어나 열심히 수도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라 하여 이 원조의 약속을 거절했다고 합니다.18) 이때 빔비사라 왕은 당신의 뜻을 이룬 다음 자신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붓다는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그에게 법을 설하게 되었습니다.
고행과 중도의 실천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12월호), pp.11-18에 게재된 것이다.
1. 수정(修定)에서 고행(苦行)으로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기까지 몇 단계의 수행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라(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선정(禪定)을 주로 배우고 닦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스승들의 경지를 체득하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할 수정주의(修定主義)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석존은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를 떠나 남서쪽 가야(Gaya, 伽倻) 교외,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강 근처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고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부근에 고요한 삼림이 있었고 강물은 맑아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오직 혼자서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수정(修定)을 버리고 고행(苦行)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행(苦行)은 당시 아지비까(Ajivika)나 자이나교(Jaina) 등의 사문들이 즐겨 실천했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아지비까는 숙명론자(宿命論者)였던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가 이끌고 있던 교단이었습니다.
아지비까라는 명칭은 원래 단순히 각각의 '생활법(生活法)에 따른 자'라는 의미이지만 교단의 명칭으로 사용하여 '생활법의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자'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사상에서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로 이해되었고, 훗날 한역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 로 폄칭(貶稱)되었습니다.
아지비까에서는 고행도 자연의 정해진 이치, 즉 결정으로 보았다거나 고행 그 자체를 목적시하였다거나, 혹은 고행에 어떠한 실천적 의의를 인정하였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지비까 교도들은 생계수단을 위해서이건 철저한 고행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이나교는 그 어느 종교 단체보다도 고행을 중요시하는 교단이었습니다.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Mahavira, 大雄)는 업(業, karma)을 미세한물질로 보고, 이 업이 외부로부터 신체 내부의 영혼에 유입(流入, asrava) 부착하여 영혼을 속박(bandha)하기 때문에 윤회의 생존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에 의해 속박된 윤회에서 벗어나 영혼이 그 본성을 발현하여 해탈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업 물질을 지멸(止滅, nirjara)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출가수행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不殺生) · 진실어(眞實語) · 부도(不盜) · 불음(不淫) · 무소유(無所有) 등 '다섯 가지 대금계(大禁戒)' 즉 오대서(五大誓)를 엄격히 지키고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형(裸形)으로 여러 가지 고행을 행하였으며, 때로는 단식 수행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붓다 당시 가장 엄격한 고행주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이 바로 자이나 교도들이었습니다.
2. 고행의 실천 내용
이러한 당시의 수행풍토에 따라서 석존도 본격적으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석존께서 실천했던 여러 종류의 고행들을 경전에서는 언급하고 있는데, 석존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실수(實修)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마음을 제어하는 것, 호흡을 멈추는 것, 단식(斷食)에 의한 것, 절식(絶食)하는 것등이었습니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이란 단정히 앉아 아랫니와 윗니를 맞닿게 모으고 혀는 위턱에 붙이고 마음을 억제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멈추는 고행이란 먼저 입과 코로부터의 호흡을 막으면 귀로 숨이 들락날락하게 되며 커다란 이명(耳鳴)이 들려 격심한 고통이 따릅니다.
이 귀의 호흡을 막으면 날카로운 정수리를 빠개는 듯한 고통이 일어나며, 또한 질긴 가죽끈으로 머리를 휘감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 숨이 하복부로 옮겨가면 배를 가르는 듯한 고통이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이같은 호흡을 막고 있으면 마치 힘이 센 남자들이 힘이 약한 남자의 팔을 잡아 잿불 속으로 집어넣어 불에 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온몸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앗기벳사나(Aggivesana)여, 신들은 나를 보고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이미 죽었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죽을 것이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아라한이다.
실로 아라한의 경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고. [<中部經典> I, p.245]
석존은 그의 고행을 본 사람들이 그가 죽어버렸다고 여길 정도로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은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일체의 음식을 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절식(絶食)에 의한 고행, 감식(減食)에 의한 고행을 계속한 결과
석존의 전신은 살이 빠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눈은 움푹 들어가고, 몸의 털은 부식하여 뽑혀지고, 피부는 생기를 잃어 그때까지 아름답게 빛나던 황금색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한 석존의 말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앗기벳사여,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옛날 어떤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았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또 미래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또 현재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는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격심한 고행에 의해서도 나는 일상의 인간이나 법(法)을 초월한 최고의 지견(智見)에 도달할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도(道)가 있을 것이다. [<中部經典> I, p.246]
이 밖에 초기경전에서는 석존이 실천하였던 고행으로서
식사에 관한 고행,
신체적인 고행,
항상 먼지나 오물로 더렵혀져도 결코 몸을 씻지 않겠다고 하는 따위의 맹세를 지키는 것 등의 고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석존이 실제로 실수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석존은 고행은 심신(心身)을 훼손시키는 것일 뿐
깨달음에 이르는 도(道)는 아니라고 명확하게 단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석존은 마음을 제어하고, 호흡을 멈추고, 감식(減食)하고, 혹은 단식(斷食)하였습니다.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육체를 괴롭혔으며,
그러한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강한의지를 확립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행은 6년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3. 중도의 실천
그러나 그것으로도 역시 궁극의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고행이 해탈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이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고행에 의해 극도로 쇠약해지고 더러워진 몸을 네란자라 강물에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따(Sujata, 善生)가 바친 우유죽을 섭취하여 심신을 회복한 후
깨달음에 이르는 자기 자신만의 수행 방법을 강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와 고행주의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Majjhim Patipada)인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욕망에 따라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열악하고 야비하며 범부가 행하는 것이며 천하고 이익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에 탐닉하는 것으로,
괴롭고 천하며 이익됨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眼)이 되고 지(智)가 되어 적정(寂靜) · 증지(證智) · 정각(正覺) · 열반(涅槃)으로 이끄는 것이다. [<相應部經典> V. p.42.]
이러한 중도를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라고 하며,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 Ariya-atthangika-magga)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팔정도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 네 가지 진리 가운데 도제(道諦)의 내용이 되는 것으로, 바로 '열반으로의 삶'이다.
중도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중도(中道)를 말하지만
이는 단지 중간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석존이 스스로 실천하여 정각에 도달한 도(道),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라면
누구든지 실수(實修)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道)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서 '도(道)' 라고 할 경우 여기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도라고 할 때의 도(道, patipada)로서 석존이 정각을 얻은 행도(行道)로서의 도(道)이며,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도법(道法)으로서 도(道, magga, Sk. marga)입니다.
전자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자가 석존의 실천방법에 따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 도(道)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도로서의 도(道)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정각을 얻은 석존에게 있어
눈(眼)이 되고 지혜(智)가 되어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道)이기 때문에
다만 객관적인 진리성을 나타내는 도(道)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인 도(道)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 중도의 실천적·철학적 의미
한편 붓다 당시 인도의 철학과 종교는
크게 바라문(波羅門) 계통과 사문(沙門) 계통의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베다·우빠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 parinama-vada)이라고 합니다.
바라문 계 사상에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이 자기 자신을 전개시켜
질료인(質料因)도 되고 동력인(動力因)도 되어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이러한 바라문 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唯一)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제(諸)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습니다.
빠꾸다 깟차야나(Pakudha Kaccayana)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고(苦) · 낙(樂) · 명아(命我)등 칠요소(七要素)를 인정하였고,
사명외도(邪命外道, Ajivika)로 대표되는 막갈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살아 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혼(靈魂)·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허공(虛空)· 득(得) · 실(失) · 고(苦) · 낙(樂) · 생(生) · 사(死) 등 12 가지원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積聚說, arambha-vada)이라고 합니다.
이 적집설은 바라문 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業, karma)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종교상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라문 계의 사상은 한결같이 선정을 실수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주장한 데 반해,
이 적집설의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수행방법은 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집설의 입장에 서서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인간은
정신이 육체에 의해 지배되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육체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정신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석존이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가르침을 버리고,
또한 고행생활에 들어갔다가 이것마저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서 주장된 전변설과
고행주의의 근거로 삼는 적집설 양자를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이러한 두 가지 입장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도 보다 높은 차원을 획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변설과 같은 절대 유일의 원리를 주장하며 그것으로부터 세계가 전개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5취온]는
상호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였다고 관찰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도리는 법으로서 정해져 있다' 고 말하였던 것과 같은 우주의 이법(理法)이며, (???)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다'라고 설하였던 것처럼
석존은 이같은 연기를 자각하여 각자(覺者) 불타(佛陀)가 되었던 것입니다.
1. 깨달음의 완성
싯닷타 태자가 네란자라(Neranjara) 강가에서 목욕하고, 우루벨라(Uruvela) 근처의 세나니 마을의 촌장 세나니(Senani)의 딸 수자따(Sujata, 善生)가 공양 올린 우유죽을 먹고 체력을 회복한 뒤, 근처에 있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명상에 들었습니다.
앗삿타 나무는 아사왓타(asvattha) 나무 또는 삡빨라(pippala, 畢鉢羅) 나무라고도 하는데, 무화과 나무의 일종입니다.
거기서 드디어 석존은 '깨달음' (anttara sammasambodhi, anuttara samyaksambodhi, 無上正等覺·無上菩提)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 즉 '깨달은 자'[覺者]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중국이나 한국 · 일본에서는 흔히 '성도(成道)' 라고 합니다.
이 말은 '깨달음의 완성' 이란 뜻입니다.
태자가 깨달음을 이룬 시기는 35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뒷날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을 붓다가야(Buddhagaya,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라 이름하였으며, 앗삿타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리수 밑에는 금강보좌(金剛寶座, 성도할 때 앉았다고 하는 돌로 된 좌대)가 있으며, 그 옆에는 사각 형태의 대탑(大塔)이 우뚝 솟아 있어 불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4각4면(四角四面)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좁혀져 있는 높이 52미터의 대탑입니다.
이 탑은 굽타 왕조의 위풍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장은 오랫동안 인도교(힌두교)의 손에 있다가 1953년 5월에야 불교도의 관리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탑 그 자체보다도 사실은 그 뒤에 있는 보리수에 이 성지(聖地)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성도한 것은 이 보리수 아래에서였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
이 보리수는 부처님이 입멸한 2백년 후에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왕(阿育王)을 비롯하여 굽타 왕조 때에도 대대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중국의 법현(法顯)이나 현장(玄奘) 스님도 여기에 찾아와 보리수 울타리가 쳐 있다는 것과 그 주변에 정사(精舍)와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유적은 그 뒤 정글에 파묻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1881년에 이르러 영국인 커닝햄이 발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2)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은 후대의 전승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 8일이라고 하며, 남방의 불교국가에서는 베사카(Vesakha 月)3)의 만월일(滿月日)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태양력으로 고치면 5월의 만월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한역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베사카 달이 인도력의 둘째 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역법(曆法)은 자주 바뀌었으나 주(周)의 역법에 의하면 음력의 11월을 첫째 달로 헤아림으로 둘째 달은 음력 12월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는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을 음력 12월 8일로 보고 경축하게 되었습니다.4)
2.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석존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후의 사정을 불전문학에서는 아주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불전문학에서는 석존께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악마(惡魔)와의 싸움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로 씌어진 <마하삿짜까-숫따(Mahasaccaka-sutta, 薩遮迦大經)>5)에서는 악마와의 싸움 부분을 생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6)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끊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안으로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아직 신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지만, 깊이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평정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한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했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에 도달한 첫 번째의 지혜입니다.7)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삶(중생)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보았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이경에 도달한 두 번째의 지혜입니다. ……8)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고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집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멸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도성제]
……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밤의 삼경에 도달한 세 번째의 지혜입니다.9)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10)
위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태자는 먼저 사선정(四禪定)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자의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태자는 과거를 상기(想起)하고 먼 몇 세대 이전의 일들을 상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태자는 초경(初更)에 제1의 명지(明知)를 얻고, 이경(二更)에서는 제2의 명지를, 삼경(三更)에서는 제3의 명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명지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제3의 명지, 즉 누진통은 곧 네 가지 온전한 지혜[四聖諦]를 알고, 세속의 허망함이 연기(緣起)의 탓임을 아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지막 지혜가 생긴 것은 새벽이 통틀 무렵이었던 것입니다.11)
한편 불전문학에 속하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묘사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라를 굴복시킨 보살은 사선정(四禪定)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사선정은 보살만이 아니고 다른 많은 수행자들에게도, 또 나중에는 부처님의 제자에게도 공통되는 수행 방법입니다.
성도한 날 밤의 보살은 이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한 날 밤 보살의 체험은 초저녁(初夜) · 한밤중(中夜) · 새벽(後夜)의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새벽, 즉 먼둥이 틀 무렵 부처로서의 자각(自覺)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선정에 의해서 바르게 마음을 통일하고 청정 결백하여 광명으로 빛나며 더러움을 여의고 번뇌를 떨쳐버려 자유로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부동(不動)의 상태에 도달한 초저녁에 보살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천안통에 의해 중생이 살고 죽는 운명을 관찰하여 바른 지(智)를 실현하며, 어둠을 없애고 광명을 일으키고 있을 때 초저녁은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보살은 역시 전과 같이 선정(禪定)에 든 맑은 심성으로 한밤중에는 숙주지(宿住智) 혹은 숙명지(宿命智)를 얻었습니다.
'숙주지'라고 함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자기 자신과 다른 중생들의 무수한 과거의 생애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살은 역시 앞에서처럼 선정에 든 맑은 마음으로 새벽에 들어갔습니다.
그 새벽을 맞을 때 보살은 인간적인 고뇌를 말끔히 없애고, 미혹(迷惑)의 근원이 되는 번뇌를 죄다 쳐부수는 지견(智見)의 광명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누진지(漏盡智)를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무엇으로 인해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원인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단 말인가.
태어남을 원인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태어나게 될까.
생존[有]으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생존하게 되는 것일까.
집착[取]으로 말미암아 생존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갈망(渴望·愛)으로 말미암아 집착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갈망이 생길까.
감수(感受 · 受)로 말미암아 갈망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접촉이 생기는가.
여섯 가지 감각[六處]으로 말미암아 접촉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여섯 가지 감각이 생기는가.
모양과 물체[名色]로 말미암아 여섯 감각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모양과 물체가 생기는가.
인식[識]으로 말미암아 모양과 물체가 있다.
무엇으로 인해 인식이 생기는가.
현상[行]으로 말미암아 인식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현상이 생기는가.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현상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 고뇌의 원인을 연쇄적으로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한 결과, 모든 것의 근원에는 '무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무명에서 시작되는 이 연쇄 즉,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처(六處)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를 십이인연(十二因緣) 혹은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3. 깨달음의 내용
사실 붓다께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성도(成道)의 과정은 일치하지 않으며 많은 이설(異說)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이설은 15가지 정도가 되는데, 크게 네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12)
① 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와 같은 이법(理法)의 증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②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 (이를 모두 합해 三十七助道品 혹은 菩提分法이라고 함)와 같은 수행도(修行道)의 완성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③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사계(四界)와 같은 제법(諸法)의 여실한 관찰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④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이처럼 성도의 과정이 전승하는 바에 따라 일치하지 않은 것은 붓다 자신이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한 교설로서 고정시켜 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13)
그러나 성도의 과정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교설 가운데 만약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연기사상(緣起思想)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연기(緣起)라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십이연기(十二緣起)처럼 완성된 형태의 연기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십이연기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기 이전의, 심원한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연기(緣起)에 대한 자각이 바로 성도(成道)의 근본적 입장일 것입니다.14)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도 "붓다가 깨달은 존재법칙으로서의 법이란 결국 연기의 도리였음이 확실하다."15)라고 말했습니다.
붓다의 성도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nibbana, nirvana)' 을 실현한 것입니다.
성도하기 이전의 붓다를 '보살(菩薩, bodhisatta, bodhisattva, '깨달음을 구하는 자'의 뜻)' 이라고 하고, 붓다가 된 후에는 '세존(世尊, Bhagavad)' 이라고 존칭(尊稱)되었습니다.16)